다리가 불편한 학생은 어떤 할아버지가 건넨 사과 하나를 받고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30대 남자입니다.가족은 어머니 아버지 저 그리고 다섯 살 어린 여동생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셨습니다. 평범한 고깃집이었습니다.

가게는 내 식구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고 똘똘한 첫째에 귀여운 둘째까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평일 동생이랑 어머니는 집에 있고 저는 학원 가기 전에 잠깐 가게에 갔습니다.

가게 구석에 자리를 잡아 가방을 내려놓고 학원 문제집이나 다시 풀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가게 천장 한쪽에 tv랑 스피커랑 달려있었거든요 그게 갑자기 펑 소리를 내면서 터졌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 붙더니 전선 타고 불이 이어지고 불길은 점점 쎄지면서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가게 한쪽을 활활 태웠습니다. 불길은 빠르게 번졌습니다.

저희 가게에는 테이블에 불판이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가스버너를 썼거든요 불길이 버너가 잔뜩 쌓인 쪽으로 번졌습니다.

주방에서 사과를 자르고 계셨던 아버지가 후다닥 나오셨습니다. 버너 쪽으로 번지는 불을 보시고 어쩔 줄 몰라 하시더니 얼른 제게 뛰어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앉는 그 순간 아버지 뒤로 무언가 터지는 소리들이 여러 차례 들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눈앞이 캄캄해졌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저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새하얀 병원복을 입고 누워 있던 저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잠깐은 내가 지금 죽은 건가 여기가 천국인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잠시 멍하니 누워 있으니까 어머니가 병실로 들어오셨습니다. 팔에 링거도 꽂혀 있고 손가락에 무슨 기계도 붙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왼쪽 다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기분 나쁜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사고 5일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를 구하려고 저를 안아주셨던 아버지는 그날 그 현장에서 그렇게 한순간에 돌아가셨습니다.

전기사고로 예측한다고 했는데 건물주는 그런 거 모르겠고 보상을 다 하라고 했습니다.

피해를 본 옆 가게에도 보상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온 보험금은 모조리 사고를 수습하는데에 쓰였습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부모님이 힘겹게 마련하신 사고나기 고작 1년 전에 구매한 아파트까지 팔아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와 제 동생은 아주 오래된 방 하나 짜리 빌라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운영이 잘 되는 가게 자상한 남편 똑똑한 아이들을 두었던 어머니는 빚만 남기고 처분한 가게에 남편도 잃고 자식까지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남의 집 살림을 하면서 돈을 버셨습니다 저의 동네에서 버스 타고 30분 나가면 으리으리한 집이 줄지어 있는 부자 동네가 나왔거든요.

그 집에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파출부 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땐 웃음이 참 많던 어머니셨는데 아버지가 떠나신후에는 웃질 않으셨습니다.

웃으실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으셨을 겁니다 여전히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동생을 돌보는 몫은 제 것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그제서야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녁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지역이랑 지연이 잘 부탁드려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편지도 쪽지도 아닌 그것을 남기고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를 떠나셨습니다.

친할머니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도 저희에게 어머니가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되려 그 어린 것이 젊은 나이에 시집왔어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그 마음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저도 자연스레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사실 마음속으로 원망을 하는 날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왜 버렸는지 알아도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동생이라도 데려갈 수도 있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럴 때면 어머니의 웃지 않는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어머니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평생 다리를 절 거라는 장애인 신청을 하라는 의사 선생님 말대로 제 다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정성으로 키워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뭘 하겠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동생 잘 돌보고 공부 잘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작은 노점상을 하셨습니다. 번데기 팔고 옥수수 팔고 찐빵도 파는 그런 자그마한 노점상이었습니다.

저는 꿈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한 번도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질 않았습니다.

놀고 싶은 마음 꾹꾹 참고 공부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장애인 특별 전형으로 의대해 갈 수 있었습니다. 합격된 거 확인하고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너무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저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과외로 학비를 벌어 등록금을 내며 열심히 학업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 하나가 제 발앞에 굴러왔습니다.저는 사과를 주었습니다.

앞에는 리어카를 끌고 가시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 리어카에는 폐지가 높게 쌓여 있었고 언덕을 오르시던 할아버지가 그만 사과가 담긴 봉투를 떨어 트린것입니다.

저는 언덕 밑에서 사과를 주어 할아버지에게 전달해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를 도와 언덕 위까지 리어카를 밀어드렸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신 할아버지는 사과를 하나 주셨습니다.

저는 사과를 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저는 사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불이 나던날 아버지가 사과를 깎아주신다고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아버지 생각,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다음 주에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 멀리서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있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이동에 할아버지를 도와드렸습니다.

사과봉지를 전달하고 너무 나도 마르신 할아버지와 손녀에게 맛있는 거 사드시라고 돈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가 게시판에 한가득 붙어있는 하나의 종이를 가리키며 이거 너 아니야고 물었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왼쪽 다리가 불편한 남학생입니다.

노란색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이 있어 꼭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누가 이런 글을 썼을까? 내게 고마운 일이 있다고 좀 당황스럽습니다.

전화를 걸었고 그분은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저는 한 아저씨와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 남자는 할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아저씨는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시면서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이렇게 학교에서도 소문이 나면서 저는 학교에서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