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5살이던 저와 3살이던 남동생을 남기고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감는다고 서울로 가신 뒤 연락이 끈겨 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골 할머니 손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머니 집에서 자란 지 1년 되던 어느 날 큰아버지와 그 형제들이 찾아와 할머니와 언성을 높이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주시고는 새신을 신겨주면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저희 남매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셨습니다. 친척들 누구 하나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다르셨습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을 못 보낸 다 너희들 헌 티 10원 한 푼 도와 달라고 안 할 머니까 보내지 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 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 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들 없는 집에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큰아버지나 친척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10원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려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넉넉하게 학용품을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니 얻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다 장에 내 팔고 여름이면 고기를 잡아다 어죽 집에 팔고 가을 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 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 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그 시간들이 스물아홉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각각 천안에 있는 상고와 예산에 있는 인문 고등 학교에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의 남매는 주말마다 할머니 가 게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안에 빵과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셨던 할머니가 새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 저 오셔서 냉장고에 넣어놓으신 거였습니다.
남들 다 새참 먹을 때같이 드시지 왜 이걸 냉장고에 넣어 놓으셨냐고 유통기한 다 지나서 먹지도 못하는 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냈습니다.
할머니는 너희들 생각에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 말이지 너희들 오면 주려고 냉장고에다 넣어났다고, 날짜 지나서 못 먹으면 어쩐다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도 할머니를 가엾다고 안쓰럽다고 생각 하지 못했던 제가 냉장고에 가득하던 빵과 우유를 내다 버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불쌍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제가 철이 들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제 시장에서 좋다는 한약재를 사서 보내드렸습니다.
할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할머니들과 식사하시라고 용돈도 보내드리고 주말이면 할머니에게 내려가 할머니와 시장 구경도 하고 명절에는 할머니 모시고 돈가스도 먹으러 갔습니다.
할머니와 돈가스를 같이 먹던 날 할머니는 돈가스도 맛있게 드시고 같이 나온 음료도 다 드시면서 양두 얼마 안 되는 것이 참말로 맛있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맛있으면 몇 접시라도 먹겠다 시며 웃으셨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그 말에 또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까짓 돈가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제야 사드리게 됐을까 가슴이 아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가 먹던 접시를 할머니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이제 할머니는 올해 팔순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우리 남매를 길러 내셨던 할머니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허리도 구부러지셨고 검은 머리가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너무 늙으셔서 예전처럼 맛있는 김치전을 부처 주시지도 못하고 개떡을 쩌 주지도 못하고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주시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제는 그때 그 맛을 내시 지도 못합니다. 길이 봄나물을 뜯으러 다닐 수도 도토리를 따러 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 하면 낡고 달아 혜진 고무신 한 짝이 떠오릅니다. 헌 고무신처럼 평생을 마음껏 가지지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며 살아오신 할머니 이제 할머니가 제 곁에 함께하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제가 할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꽃으로 태어났으니 들풀로 사셔야 했던 그분의 인생 이제부터라도 화사한 꽃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신 할머니 이제 저는 할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꽃 길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