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아직 미혼인 딸아이가 하나 있는 60대 여성입니다.
“엄마, 나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한번같이 볼래요?”
“뭐? 소개할 사람? 너 그냥 남자친구가 아니구나? 둘이 그만큼 진지한 거야? 근데 왜 그동안 말을 안 했어?”
“그래서 지금 말하잖아. 사실 나도 신중하고 싶어서 쉽게 말을 못 한 거지. 근데 진혁 씨 좋은 사람이야. 내가 많이 의지하고 있고. 내가 처음으로 결혼해도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정도야? 우리 딸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엄마도 기대되는데”
그렇게 만나게 된 예비 사위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둘이 나란히 서있는 걸 보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 보였습니다.
듣기로는 학창 시절부터 공부도 잘하고 예의범절도 바르다고 했어요.
그런 사람이 저한테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죠. 딸아이 말로는 그 집 안이 옛날 조선시대 학자 집안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저 해린 씨와 교제 중인 박진혁이라고 합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해린이 엄마예요.”
”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잘 생겼네. 거기다가 예의까지 바르니 부모님이 참 든든하시겠어요.”
“아닙니다. 과찬이세요. 저는 해린 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죠. 제가 더 노력해야 합니다.”
“겸손하기까지 하네. 하긴, 둘이 어울리니 결혼 생각까지 했겠죠. 아무쪼록 예쁘게 잘 만나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우리 딸이 누구를 데려오는 게 처음이라 나도 긴장을 했거든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이미 사위처럼 생각하던 어느 날, 저는 우연히 예비 사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밖에서 식사를 하자고 나간 자리에 예비 사돈이 앉아 계시더라고요.
“어머님, 갑자기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내일 어머니랑 식사를 하기로 했었는데, 어머니가 그게 오늘인 줄 알고 착각을 하셔서요…”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해서 일이 꼬였네요.”
“아닙니다. 이렇게 다 같이 보게 된 것도 인연이죠 뭐. 안 그래도 아이들 문제로 제가 만나 뵈어야 되겠다 싶었는데 차라리 잘 된 거 같네요.”
그렇게 사돈될 집안이랑 상견례 아닌 상견례를 하게 되었죠.
사돈까지 뵙고 나니 더더욱 결혼 결심이 섰던 저는 해외 출장 중인 남편이 돌아오면 바로 상견례를 하고 아이들 결혼을 준비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평소처럼 봉사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제가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는데 최근 들어 청소 봉사를 하게 되었거든요. 청소 봉사라는 게 하루 종일 길이나 하천에 있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이다 보니 옷이 많이 더러워지곤 해요. 저희들 끼는 누가 보면 노숙자 줄 알겠다고 하면서 웃을 정도니까요.
제가 열심히 쓰레기를 줍고 있는 중에 멀리서 예비 사위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사위를 반기기에 적절한 차림은 아니었지만 평소 예의 바른 사위라면 제 꼴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거든요.

제가 먼저 아는 체를 하려고 하는데 코앞까지 다가온 사위가 그런 저를 무시하더니 냄새가 나는 것처럼 코를 움켜쥐고 인상을 쓰며 저를 쌩 지나치는 거예요.
설마 일부러 그랬겠나 싶어서 저는 사위가 저를 못 알아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저는 예비 사돈에게 전화를 한통 받게 되었습니다.
“저 전에 뵈었던 진혁이 엄마입니다.”
“아.. 내 사돈이 전화를 다 주시고, 어쩐 일이세요? 혹시 상견례 날짜 때문에 그러시나요?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고요. 제가 상견례 전에 해린이 어머님을 뵙고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최대한 빨리 볼 수 있을까요?”
“네. 저는 뭐 한가해서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언제가 좋으세요?”
“괜찮으시면 내일이라도 당장 뵙죠. 제가 마음이 좀 급해서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다급하게 약속을 잡으시나 싶었지만 아이들 문제인가 싶었던 저는 예비 사돈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사실 며칠 전 사위가 저를 피했던 일 때문에 마음이 쓰이고 있던 참이라 잘된 일이라 생각했죠.
“사돈, 먼저 와 계셨네요. 저도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와있던 거니까, 죄송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앉으시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런데 아이들도 없이 저희끼리 따로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그 자꾸 사돈, 사돈하시는 호칭이 조금 불쾌하네요. 아직 그런 사이도 아닌데 사돈이라고 하지 마시죠.”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요… 애들끼리 결혼을 약속했고 저희 끼리도 이미 인사를 했는데 갑자기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혹시 진혁이가 마음이 바뀐 겁니까? 둘이 결혼을 안 하겠다 그러나요? 설마 그래서 저를 따로 보시자고….”
“네. 그 일 때문에 만나자고 연락드린 거예요.”
“예? 애들이 정말 헤어지기라도 한 건가요? 해린이는 별말 없던데요. 아니, 저희 딸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애들 사이에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결혼 못 시킬 것 같네요. 뭐 문제가 있다면 부모 잘못 둔 잘못이겠죠.”
“할 말이 있으시면 제대로 해주세요. 계속 사람 떠보듯 돌려 말하지 마시고요.”
“글쎄요. 뭐가 잘못인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제가 전에 만났을 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희 집이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요.”
“예 뭐 무안 박 씨 몇 대손이라고 말씀하셨었죠. 근데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십니까? 설마 이제 와서 저희 집안 족보 확인이라도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 하자는건 아니고요. 저도 박 씨 집안 며느리지 박 씨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며느리로서 사돈 될 집안 됨됨이는 따져봐야 돼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자꾸 저희 집안 얘기하시려는 것 같은데, 뭐가 불만 이시길래 이렇게 하시는 건지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대체 뭐가 문제이십니까?
“저희 아들이 얼마 전에 이상한 걸 봤다 그러더군요. 사돈이 길에서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고.”
예비 사돈이 갑자기 며칠 전 이야기를 꺼내는 겁니다. 저를 못 알아본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요.
“저희 아들 보셨죠? 그때 그거 해린 어머니 맞으시죠?”
“예, 본 거 같네요. 저는 아드님이 저를 못 본 줄 알았더니, 저를 알아보고도 무시했던 모양입니다.”
“하, 내가 정말 기가 막혀서, 그래서 그걸 다 들켜 놓고 아직도 당당해요?”
“예? 뭐가 말이에요? 제가 뭐 들키면 안 되는 걸 들켰습니까? 청소하고 있는 게 뭐 어때 가지고요?”
“뭐가 어떻냐니요! 저희 집 어떤 집안인지 모르세요? 조선시대 때부터 학자들 배출하고, 뼈대 있는 선비 집안입니다. 그런데 그런 집안에 사돈으로 청소부를 들입니까? 저희가 아무리 없어도 청소부 집안과는 결혼 못 합니다.”
예비 사돈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청소부 집안과 결혼을 못 시키겠다는 말, 지금 저가 지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때 저희 아들이 충격을 무척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염치도 없으시지. 그 꼴로 심지어 저희 아들 아는 채 하셨다면서요?”

“애가 직장 동료들이랑 다 같이 있는데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인사를 나누는 것도 때와 장소가 있는 거지, 사람 난처하게 하는 것도 무례가 된다는 거 모르세요?”
어떻게 사돈 될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는지 당황스러웠는데,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더라고요. 그제야 저는 제게 만나자고 전화를 하면서 사돈이라는 호칭 대신 저를 해린이 엄마라고 불렀던 예비 사돈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청소부라는 그 이유 하나로 결혼 못 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제가 청소부라서요?”
“그래요, 이제야 말이 통하네요. 나도 대놓고 이런 소리 하는 거 내키지 않아요. 저도 평생 양반집 며느리라는 자부심에 살아온 사람인데, 이런 얘기 하는 게 편하겠습니까?”
무척이나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사돈이 직접 본건 아니었으니, 예비사위가 충격을 받았겠네요. 그놈이 자기 엄마한테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 여자는 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건 오히려 저네요. 저야말로 지금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 안 나옵니다. 지금 정말 그것 때문에 파혼하자고 하시는 거 맞죠? 아드님도 동의한 일입니까? 아 그렇죠. 아드님이 직접 얘기를 전했겠고, 저를 창피하다고 했으니까 같은 생각이겠네요.”
“괜히 제 아들 걸고넘어지실 것 없습니다.”
“제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청소부 집안과는 왜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거예요? 양반집 아들이 머슴 집 딸이랑 결혼하는 거 봤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파혼시킵시다. 근데 저 청소부 아닙니다. 그날 봉사활동 한 거예요.”
“예 예 그러시겠죠. 변명이라도 해서 면이 서면 그렇게 하세요.”
그런 생각을 하는 집안과는 결혼시킬 생각은 저도 이제 없지만, 저를 끝까지 오해하고 있는 여자에게 사실이라도 알려주려고 말을 꺼냈더니, 이미 저를 청소부로 단정 짓고 있는 그 여자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 변명으로 들리나 본데 저 봉사활동 다니는 거 맞고요, 힘들게 일하시는 분한테 봉사활동 하는 게 팔자 좋은 자랑처럼 들릴까 봐 말을 안 했는데, 그래서 이런 오해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본의 아니게 좀 죄송스럽게 됐네요. 이런 오해만 아니었으면 댁네 아들이 회사 물려받을 뻔했는데.”
제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그 여자에게 남편에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명함을 받아 든 여자는 그제야 깜짝 놀라며 동공이 흔들렸죠.
“이.. 이게 진짜 당신 남편 명함이라고?”
“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으시면 그러세요. 거기 전화번호도 있고 제이름도 알고 계시니 확인해 보시면 그만 아닙니까?”
“댁 네 아들이 저희 회사 들어오려고 반년이나 이직 준비 중인 것도 알고 계시겠죠?”
사실 제가 예비 사위를 더 눈여겨보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예비 사위의 포부 때문이었습니다. 둘이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는 걸 듣고 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예비 사위가 하필이면 저희 남편 회사에 면접을 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랬던 사위가 저를 잠깐 보고서 갑자기 청소부라고 오해하고 파혼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비겁하게 자기 엄마 등 뒤에 숨어서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자기 발로 먼저 파혼을 해준 예비 사돈과 사위에게 되려 고마울 지경이었죠.
“뭐 자세한 건 댁네 아드님께 가서 직접 들으세요. 그 명함 보여주면 무슨 소리를 할지 나도 좀 궁금하네. 근데 뭐 이미 볼장 다 봤고 파혼하기로 했으니까 후회야 이제 그쪽 몫이겠죠.”
그 여자는 끝까지 저를 의심하며 명함을 들고서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진실은 금방 밝혀지겠죠.
다행히 그 명함이 진짜라는 걸 그쪽에서도 알게 되었는지, 그날 저녁 예비 사위가 저희 집을 찾아왔습니다.
집에 초대한 적도 없었는데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고 왔나 했더니 아직 사정을 듣지 못한 저희 딸을 대동하고 왔더라고요.
“어 엄마 진혁 씨가 엄마한테 꼭 할 말이 있다 그러는데… 혹씨 무슨 일 있었어?”

“뭐?? 그놈이 여길 왜 와!! 네가 데려왔니?”
“아니, 진혁 씨가 하도 부탁을 해서. 엄마도 나한테 할 말 있다며? 그래서 오는 길에 같이 왔지…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낮에 있던 일을 딸아이에게 얘기해야겠다 싶어서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오라고 불렀더니, 그놈을 달고 같이 왔더라고요.
결국 저는 대문 앞에 꿇어앉아있는 그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 자네 어머니에게 우리가 나눈 말 다 못 들었나? 우리가 더 볼일은 없을 텐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나? 자네 잘난 양반집에서는 약속도 안 한 집에 막무가내로 쳐들어 가도 된다고 가르치는 모양이지?”
“죄송합니다 어머님! 제가 정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용서를 구하러 찾아왔습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자네가 무슨 무례를 저질렀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 우리 딸도 아나? 아직까지 자네를 감싸고 있는 내 딸을 보니까, 우리 딸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장모님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예요. 저희 어머니가 독단적으로 그러신 거지, 저는 해린이와 파혼할 생각 없었습니다.
“그래, 어디 자네 입으로 내 딸한테 말해보게. 자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럼 내가 용서를 해볼지 말지 생각해 보지”
자기 약혼자 입에서 사실을 듣게 된 딸아이는 무척 충격이 커 보였습니다.
그놈은 끝까지 저희 딸 다리에 매달려 파혼을 물러보려 했지만 이미 마음이 상한 저희 딸은 얄짤없이 그놈을 내팽개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