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고 가장 자신 있었던 것은 공부였습니다.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영어였습니다.
저의 꿈은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반찬을 만들어 판매했고 동생은 희귀 난치병으로 평생을 남들보다 더 애쓰며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이렇게 세 명이었고 저에게 꿈이란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어머니와 아픈 동생을 뒤로하고 저만 잘 살겠다고 대학에 입학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대학을 포기하고 폐차장에서 일을 했고 몸은 힘들었지만 돈을 번다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다녔던 거 같습니다.
돈을 벌어야만 동생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미안해하셨습니다.
공부를 잘하던 아들이 대학을 포기하고 막일로 산다는 것을 마음 아파하셨어요.
그런데 우리 가족 앞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는데 배가 심하게 아팠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검은색 형체들은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몸은 점점 이상 증상이 일어났고 저는 병원 진료를 받게 되었어요.

” 위암입니다.”
” 위를 절제해야 합니다.”
제가 위암 3기이고 위를 절단해다 한다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듣던 순간 저는 귀에서 이명이 들렸고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 제가 뭘 잘못했나요? 왜 하필 저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요?” 머리로 생각하고 있던 말이 입으로 튀어나왔어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일 이 있더라도 저는 울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습니다.
가족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밝히기까지 너무 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파할 가족들의 표정이 눈에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 어머니..”
” 그래 말해봐 왜 그러는데?”
”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 제가 며칠 전에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요.”
” 검사를 했는데…”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오열하고 말았고 어머니의 얼굴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머니는 덜덜 떨리는 제 두 손을 힘주어 잡아주셨고 어머니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 제가 병에 걸렸습니다. 어머니 의사 선생님 말로는 위암 3기라고 했어요.”
” 수술하면 살 수는 이는 정도래요.”
어머니는 오열하셨고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도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우리 집은 눈물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음날 다시 어머니와 병원을 갔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 환자분 스트레스는 절대 받아서는 안됩니다.”
” 환자분이 좋아하는 것.”
” 환자분 신체와 마음이 편안한 일만 하세요.”
”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입니다.”
” 그동안 하고 싶은데 하지 못했던 것들을 중에 단 하나라도 찾아서 해보세요.”
” 성취감을 느낄 거고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때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고 조금은 공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그런 말처럼 들려서 괴롭기만 했습니다.
저는 공부를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이 항상 있었고 공부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죽을 때 죽더라도 공부를 해서 대학에 합격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위 절개 수술을 했고 한 달 동안은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암 덩어리들과 싸우며 예민한 나 자신과 싸우며,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어요.

퇴원을 하고 본격적으로 대입 공부를 하는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6 개원 간의 항암치료가 끝이 났습니다.
저는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어머니를 도와 반찬가게 보조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암은 제발하지 않았고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반찬가게를 하지 않아도 되는 어머니는 좋은 분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은 어머니에게 반찬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예쁜 아내가 생겼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갔고 이듬해 완친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3월 저는 다시 또 개강을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왕 대학에 왔으니 이참에 교수도 되어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늦은 나이에 참 발버둥을 쳤었습니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점이었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꿈을 응원해 준 사람이 세명이나 되니까요. 어느덧 저는 이제 정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불행처럼 보였던 것이 알고 보니 행운과 기회를 가져다주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결국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하느냐는 온전히 자신의 몫 저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날 불쑥 저에게 찾아왔던 암이라는 불행은 결국에는 그것을 극복하고 서울대를 나와 지방의 한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도록 행운과 기회를 가져다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