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매를 10년 동안 친엄마처럼 키운 새엄마 등본을 떼고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아 찾아가 아이들 얼굴을 보고 쓰러저 오열하는데..

저는 홀아버지 손에서 자랐습니다.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살았습니다. 엄마는  7살 차이가 나는 동생을 출산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31살의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었던 아버지는  그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엄마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컸는지 엄마를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는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할 여유가 없으셨을 겁니다. 저와 동생을  향한 사랑만큼은 차고 넘치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꼭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이셨어요.

저녁을 먹은 걸 치운 뒤에는 동생과 저를 씻기고 저와 동생이 잠들 때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주셨죠.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의 노력으로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남매를 10년 동안 친엄마처럼 키운 새엄마 등본을 떼고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아 찾아가 아이들 얼굴을 보고 쓰러저 오열하는데..

제가 대학 들어갈 무렵 아버지에게  좋아하는 여성분이  생기게 되었고 저는 그동안 우리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아버지가 좋은 분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많이 좋아하는 눈치였고 상대 여자분은  가볍게  교제하는 정도로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 아빠 혹시 아빠가 애 딸린 남자라 싫대…?”  알고 보니 아버지가 2년이나 짝사랑을 했다고 했습니다.

” 아빠 내 생각에는 아빠가 연애한 지 오래됐잖아?”

” 그래서 연애 감이 좀 떨어진 것 같아 내가 도와줄게!”

아버지는 웃으면서 대답하셨죠.

” 딸.. 호의는 고마운데.. 너 그거 아냐? 모태솔로…?”  아버지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저는 주춤했지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  그.. 그래도 여자 마음은 여자가 잘 아는 거야!  그리고 나 공부 잘하는 거 알지? “

” 내가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한 것 같아? 걱정 마 아빠 나만 믿어.”

그리고 아버지는 그 여자분에 대해서 말해주셨습니다.  

”  아빠  그분 하고 나이 차이는 얼마나 나?”

”  별로 차이 안 나지?” 아버지는 이상하게 우물쭈물하셨어요.

“아홉.. 살  아홉 살 차이 난다고..” 아빠는 당시 43세였고  9살 어리다는 그분에 나이는 34살이었어요. 그렇게 저는 아버지의 연애를 도왔고  1년 후 여자분은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셨고 두 분은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남매를 10년 동안 친엄마처럼 키운 새엄마 등본을 떼고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아 찾아가 아이들 얼굴을 보고 쓰러저 오열하는데..

새어머니는 저희에게 잘해주셨고  저는 자취를 해서 집에서 함께 살지 않지만 동생은  같이 살았거든요. 한참 사춘기이던 동생은 새어머니에게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새어머니의 진심 어린 행동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대학을 졸업했고 취업을 하기 위해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했습니다. 부모님 기준의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해야 해서  동사무소로 가서 해당 서류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새어머니 밑으로  자녀가 있었습니다  새어머니에게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 저는 당황스러웠죠.

” 혹시 새어머니가 요즘 심란하신 게 이거 때문은 아닐까?”

저는 아빠에게 갔고  가족 증명서를 보여드렸어요. 그런데 아빠는 다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 아빠는 다 알고 결혼한 거지?”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셨고, 그동안 우리에게 말하지 못했던 사정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새어머니가 아버지의 3년간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아빠를 만나기 전에  결혼해 이혼을 했고  새엄마는 전 남편의 학대를 못 견디고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전남편 때문에 남자를 믿지 못해서 결혼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양육권이 전 남편에게 넘어갔던 것이죠. 경제권이 없다는 이유로 새어머니는 아이들의 양육권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새어머니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을 없었습니다.

새엄마는 아빠와 재혼을 하면서 더 자식들을 만날 수 없었고  양육비만 보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에게 연락이 왔고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 엄마 엄마는 우리를 버린 거지?”

” 우리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도 엄마를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남매를 10년 동안 친엄마처럼 키운 새엄마 등본을 떼고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아 찾아가 아이들 얼굴을 보고 쓰러저 오열하는데..

그런데 새어머니의 자식들이  그 집에서 학대를 받고   개밥에 도토리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새엄마가 요즘 아이들과 함께 살지 못한 죄책감에  힘들어하고 있다고 아빠는 말해주었죠.

새어머니 자식은 하나는 14살이었고 동생은 13살이라고 했어요  그 작은 아이들에게 학대와 폭행을 일삼는 다니 저도 화가 치밀었습니다.

걱정하는 저에게 새엄마는 미리 말해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 엄마 가족이라면 어떤 허물이라도 보듬어줄 줄 알아야 한다고 제가  엄마 손에서 자라면서 배운 건 그거였어요.”

”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엄마는 제 엄마예요.”

” 엄마가 저를 보듬어주셨던 것처럼 저도 어머니를 보듬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새엄마는  애써 참는 눈물이 결국  쏟아졌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보러 갔고  아이들 모습은 참담했습니다.

친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할머니라는 사람은  도박중독이었어요. 이런 상황이었다 보니 아이들을 데려오는 일은 큰 문제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 남매를 10년 동안 친엄마처럼 키운 새엄마 등본을 떼고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아 찾아가 아이들 얼굴을 보고 쓰러저 오열하는데..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둔 법적 조치는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려가겠다는 우리 가족의 통보에  그쪽에서 허락했기 때문이었죠. 마치 이제는 키우기 귀찮다는 듯한  행동과 말투로 말입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우리 가족을 받아들이지 많았지만  우리 가족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엄마의 따뜻한 손길과 우리 가족이 관심에  점점  마음에 문을 열기 시작했어요. 이제 제법 우리는 한 가족처럼 가까워졌고  그렇게 7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같은 달 생일이기 때문에  함께 생일을 챙기거든요 그런데 막내가 우물 쭈물하며 작은 상자 두 개를 꺼내더군요.

아버지와 저는 상자를 열어보았고 그곳에는 작은 지갑과 넥타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간 막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일 선물을 산 것이었어요.

7년 전 처음 왔을 때는 저를 누나라고 부르지 못했던 아이가 이렇게 커서 선물을 준비하고 대학도 들어가고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습니다. 저를 보고 있던 막내는 말하더군요.

” 누나는 한 번도 내 생일을 그냥 넘어간 적이 없잖아 내가 직접 돈을 벌어보니까 알겠더라 아무리 고생해서 번 돈이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건 아깝지 않아!”

우리 남매를 10년 동안 친엄마처럼 키운 새엄마 등본을 떼고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아 찾아가 아이들 얼굴을 보고 쓰러저 오열하는데..

감동적인 동생의 말에 일렁이는 분위 그를 깨뜨린 건 다름 아닌 셋째였습니다.

” 나도 준비했지!! “ 향수와 아버지를 위한 등산화였어요. 저는 뭘 이런 걸 준비했어라고 말했고 셋째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 고마워 , 누나.”  

” 아빠  감사합니다.”

” 고마워요 엄마, 고마워 형…” 인사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눈물 많은 우리 가족 덕에 그날 생일파티는 또다시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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