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저와 함께 있어도 저를 없는 사람 취급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저곳 안 살아 본 곳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결국에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일 때 저를 보육원에 맡겨버렸습니다. 저는 그날 아버지는 제 손을 떼내던 단호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친할머니가 오셔서 저를 고아원에서 데리고 나와 그때부터 할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살면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코피가 터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에 매진한 결과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할머니는 제가 군 생활 도중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장례식장에 갔는데 친아버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뺀질 뺀질한 얼굴로 또 다른 젊은 여자와 함께 장례식장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여러 번 여자들과 결혼을 했고 그런 여자들 때문에 저를 고아원에 버렸습니다.

” 야~ 이게 누구야? 너 보성이 아니니? 많이 컸다 잘 컸네.”
” 너 군대에서 온 거야? 너 좋은 대학 다닌다며? 내가 공부는 안 했어도 머리가 좋거든 나 닮았나보네”
혼자 저를 보며 떠들어대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는 장례식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를 잃은 슬픔에 군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서 관심 병사가 되었어요.
결국 만기 전역을 하지 못하고, 다섯 달을 남겨둔 채 일찍 전역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로 돌아오니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아버지는 할머니가 남긴 재산을 전부 가져가 버렸고 저에게 남은 건 제가 군대 가기 전에 모아놓은 보증금이 전부였습니다.
서울에 원룸을 얻고 복학을 미룬 채 택배 상하차를 하며 배달 일을 하면서 몸을 쓰고 일하며 돈을 모았어요. 그러다 영어학원에 점심배달을 갔다가 반가운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 혹시 너 보성이 아니니?” 보육원 있을 때 단짝이었던 우영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반가웠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고 그날 이후로 점점 더 가까워져 사귀게 되었어요.

그리고 2년 후 오래된 아파트를 대출을 받아서 매매로 들어가서 신혼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임신을 했습니다.
” 자기야 나 임신했어 7주 됐다네~”
“긴가 민가 해서 갔는데 임신 7주 차라고 하더라고 나 얼떨떨한데 너무기뻐“
” 뭐? 정말.. 우영아 ~ 진짜야? 왜 진작 말 안 했어? 병원 혼자 간 거야? 같이 가지.. 너무 고마워 사랑해.”
”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입덧하거나 그런 거 아니야?”
아내는 찐 고구마가 먹고 싶다고 말했고 동네에 하나 있는 슈퍼로 달려갔습니다. 수퍼 아주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잘해주셨는데요.
” 내가 남편 가고 자식도 없는데 두 사람 보면 왠지 내 자식 같고 잘 사는 거 보니까 기분도 좋고 그래요.”
” 저희도 부모님이 안 계셔서 아주머니께서 따뜻하게 대해주실 때마다 너무 감사하고 좋습니다.”
” 새댁 사과 좋아하지? 사과 좀 가져가 ” 아주머니는 공짜로 과일도 챙겨주시고는 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돈을 드려도 서비스라면서 그냥 주셨어요.
저희 부부는 고마우신 슈퍼 아주머니에게 선물을 사서 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내는 진통이 오고 병원에 가게 되었어요. 진통이 5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이가 나올 기미가 안 보여서 결국에는 제왕절개를 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건강한 아들을 태어났어요 아이를 보자마자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고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고 수십 번 다짐했습니다.
슈퍼 아주머니는 아내에게 영양제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이를 낳고 빈혈이 생긴 아내에게 아주머니는 철분제 등 영양제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정말 세심하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예상치도 못한 사이에 제 앞에 훌쩍 다가와 있었습니다. 아이가 이백일을 지난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집에 갔는데 울고 있는 아이옆에 아내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내의 몸이 차갑게 굳어 있었습니다. 숨을 쉬고 있지도 않았어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119를 불렀고 급하게 슈퍼 아주머니에게 저희 아들을 맡겼습니다.
” 아주머니 저희 애 좀 잠깐만 봐주세요.”
” 제 아내가… 저 지금 급해서요 부탁드릴게요.”
병원에 도착한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이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왜 불행한 일만 생기는 건지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는 아내를 따라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아들을 데리러 슈퍼 아주머니에게로 향했고 아주머니는 저에게 고생했다며 집으로 데려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밥을 차려주셨어요.
” 산 사람은 살아야지 조금이라도 먹어.” 저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억지로 밥을 입에 넣어 삼켰습니다.
아주머니 집에는 갓난아이 사진이 크게 벽에 걸려있었어요. 자식이 없다고 들었는데 누구일까 묻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밥을 먹고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 아주머니 정말 잘 먹었어요. 감사해요.” 그런데 아주머니가 저를 붙잡고 사정을 하더라고요.
” 아기랑 며칠 더 있게 해 줘 애 아빠 지금 상태로 애 데리고 갔다가 큰일 나 그리고 이거 받아요.”
” 이게 뭐예요?”
” 내가 장례식을 못 가서 조의금 좀 넣었어요. 얼마 안 되지만 받아줘요.”
” 아니에요 뭐 이런 것까지 저희 아기 봐주신 걸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 그냥 받아줘~ 이십만 원이야 얼마 안 돼 아기 엄마도 친한 사이였고 정말 내 속이 다 썩어 들어가는 것 같네..”
저는 아주머니의 말에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이는 하루만 더 봐달라고 부탁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세상에 없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데리러 가야 해서 다시 슈퍼로 향했고 아들이 저에게 안기면서 티셔츠 한쪽을 쭉 잡아당겼어요. 그 바람에 제 어깨에 있던 화장 자국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있던 상처였거든요.
그걸 본 슈퍼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었어요 그러더니 제 어깨를 붙잡고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 이거.. 이거 이 화상 자국..”
” 아 이거 괜찮아요 저 아기 때부터 있던 상처라서 저는 기억도 안 나요.”
” 너 너 혹시 보성이니?” 그때까지 제 이름을 모르고 계셨던 아주머니께서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 네 제 이름 보성이 맞는데요 김보성이요.” 제말에 갑자기 아주머니는 저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지 영물을 알 수 없었던 저는 그저 아주머니에게 괜찮으시냐고만 물었어요.
” 이렇게 지척에 두고 내가 몰랐다니.. 보성아..”
” 내가 네 엄마야 친엄마 보성아..”
” 그럴 리가요 저희 어머니는 저 1살 때 저를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갔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제 손을 붙잡고 같이 본인 잡에 가자고 했습니다.
” 나도 이렇게 믿기 힘든데 너는 오죽하겠니 내가 보여줄 게 있어 같이 가자.”
아주머니는 방에서 서류가방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 이거 내게 너 가졌을 때 썼던 산모 일기랑 너 낳고 나서 탯줄 자른 거랑 출생증명서야.”
” 네 아빠 김의성 맞지?”
” 그 인간이랑 결혼해서 너 낳고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너도 알지? 그 인간 인간인지 내가 하는 말이 변명처럼 들릴 수는 있는데 그땐 나도 살고 봐야 됐어.”
” 하루가 멀다 하고 바람피우고 손찌검하는 그 인간에게서 벗어나야 살 것 같았어. 그렇게 집을 나왔단다.”
” 그런데 그 인간이 네가 죽은 걸로 한다고 네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고 사라져 버린 거야.”

모든 것이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맞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난 후 수소문을 해서 저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와 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 저 어머니 원망 안 해요 이렇게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신 것 같아 너무 다행이고 만날 수 있게 돼서 기뻐요.”
어머니와 저는 그렇게 기적처럼 만나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부터라도 엄마 노릇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고 하셨고 아들도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제 아들과 함께 야외 나들이도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