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올해 40두 살 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집사람 하고는 고등학교 때 미팅으로 만나서 오빠 동생 지내다가 1999년 11월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알콩달콩 재미난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결실로 이 2002년 첫째, 딸이 태어났고 2004년에 둘째,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여보 애들한테 돈 들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내 수술하는 게 어떻겠노”
더 이상 출산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정관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08년 봄 무렵이었습니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감긴가”
“자도 자도 왜 이리 졸리지”
“여보야 저기 우리 혹시 아이 생긴 거 아닌가?”
” 에이 내가 정관 수술한 지 3년이 넘었는데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그리고 며칠 후 제 아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를 했는데..
“여보야 나 임신한 거 같아 아이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어쩌면 좋아?”
” 하늘에서 주신 아이인데 당연히 낳야지!.”
” 근데 당신 내 의심 안 하나?”
” 의심 아이고 마 낳고 나면 다 알게 될 건데 마 이런 걸로 무슨 의심거리가 되나 이 사람은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분명 정관 수술을 했는데 아니 어떻게 임신이 된 건지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내에 대한 믿음은 어느 순간 의심으로 바뀌었고 저는 잠깐 나갔다 온다는 아내 뒤를 조심조심 밟았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집 근처에 슈퍼 최 씨 아저씨랑 정답게 하하허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가 않았어요. 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성큼성큼 둘에게 다가갔습니다.
“내 당신을 그리 믿었는데 겨우 이 놈 이가?”
“어머나 당신 나 지금 몰래 쫓아왔나?”
” 아이들은 어쩌고?”
” 애들? 애들 생각한다는 엄마가 이러고 있나?” 저는 슈퍼 최 씨에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 참말로 아저씨 내 그리 안 봤는데 참말로 실망입니다.”
” 예?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 아고 이 사람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노?”
“당신 하고 최 씨 아저씨가 그러고 그런 내연관계 아닌가?”
아내와 슈퍼 최 씨는 억울하다고 팔팔 뛰고 날 리가 났습니다. 상상. 후에 의사 선생님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수술을 했어도 임신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그러나 가질 수 있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2008년 12월 제 호랑이 눈썹과 꼭 닮은 셋째,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셋째가 태어나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우리 가족은 늘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 2010년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마다 혈변을 본다던 아내는 날을 잡아 병원에서 위와 대장 내시경을 검사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쯤 지났을까? 제 아내가 아닌 의사에게서 잠깐 봤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 뭐 문제가 있습니까?”
“여기 내시경 사진을 좀 보시겠습니까? “
” 대장 맨 끝에 꽤 큰 종양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직경이 상당히 큰 편인데요. “
”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한번 가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큰 병원으로 가야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머릿속이 멍해졌습니다.
일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하고 진료실 문을 나오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아내가 해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도 아내는 암말기 판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내 이제 38입니다. 우리 셋째, 막내가 겨우 3살입니다. “
“선생님 제발 좀 도와주시고 제발요.” 선생님께 빌고 또 빌다가 울먹이며 나온 저한테 아내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나 암이야?”
” 이게 언제부터 내 몸에 있었던 거야?”
” 걱정 마라 여기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이고 당신 나 믿지? 항암치료 잘 받고 깨끗이 나을 수 있다.”
”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우리 같이 힘내자.”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항암치료를 아내는 참으로도 잘 견뎌 주었습니다.

독한 항암제를 맞으며 머리가 다 빠지고 입안이 헐고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까맣게 변색되었고 그렇게 겨우겨우 3차 항암 치료를 마치고 다시 결과를 확인하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림프절과 간으로까지 전이된 암은 지난번에 비해 확연하게 더 커져 있었습니다.
” 여보야 내 그냥 놔주면 안 되나?”
” 내 하늘나라 가서 좋은 사람 하나 보내줄 테니까.”
” 나 그냥 놔주면 안 되겠나 “
” 니 그게 무슨 소리고 니 죽으면 나도 죽는 데이.”
” 좋은 사람? 바보야 그런 소리 하려거든 우리 여기서 둘 다 죽자!” 우리는 집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한참을 목놓아 울었습니다.
아내는 암과 힘겨운 사투를 벌였지만 2012년 12월 30일 밤 10시에 끝내 아내는 나와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하늘로 떠났습니다.

6살짜리 막내아들은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은 결혼생활 14년 동안 큰소리 내서 싸워온 적도 없고 늘 내게 힘을 주며 검사하고 알뜰했던 우리 아내 제 얘기를 귀를 기울여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아내가 우리 가족 곁을 떠난 지 이제 1년이 되었습니다.
아내에게 쓰는 편지
여보 벌써 1년이 지났네…
난 여기에서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과 맛난 것도 먹고 가끔은 웃으면서 잘 살고 있는데. 당신이 있는 그곳은 어떤가?
너무 어둡고 외롭지는 않은가? 편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당신만 우리 곁에 없네!
당신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정말로 미안해.. 하늘나라에서 조금만 기다려줘!
우리 막내 장가가는 거는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여보 그때까지 우리 가족 지켜줄 거지? 우리 가족 매일 보고 있는 거지? 나 이제 울지 않으련다!
나는 씩씩한 아빠니까.
여보 너무 많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