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세상 나만은 늘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늘 고민하는 40대 여자입니다. 저희 엄마가 제게 늘 그렇게 말씀하셨었어요. 너하고 나는 아빠한테 버림받은 여자들이라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빠 없이 가난했던 저희 가족은 나라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먹고살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많이 아프면서 안 그래도 가난했던 집안이 더 어려워지게 되었답니다.

그때가 제 나이 9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입니다. 악몽이 따로 없던 팔자였지만 그런 인생에도 굳이 악몽이 찾아오더라고요.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 내 삶은 망한 삶이라고 확인사살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어요. 저는 늘 작아진 옷을 억지로 껴입고 작아진 신발을 구겨 신은 채 등교를 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왕따라는 것은 제게 정해진 숙명 같은 것이었어요. 친구들은 하나같이 저를 피했고 그래서 저는 혼자가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웃어본 적이 없었기에 웃는 법을 알지 못했고요. 그렇게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3학년이 시작되었어요.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급식을 중단하고 도시락을 싸 오라는 공지가 내려졌습니다. 집에 밥이 없는데 어떻게 도시락을 싸 가지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는 말씀하셨어요.
“쌀이 없다. 다희야 친구들 것 좀 나눠 먹으면 안 되겠니?” 집에는 쌀이 없었고 엄마는 늘 힘이 없었고 그리고 제게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배가 미친 듯이 고픈 거예요. 벌컥벌컥 아예 이불 수도꼭지에 가져다 대고 물을 마시고, 또 마셨어요. 그런데 그때 담임 선생님이 다가오셨습니다.
“다희야 너 혼자 여기서 뭐해 밥 먹어야지?” 밥이라니 단어만 들었을 뿐인데 뱃속이 요동을 찼어요. 갑자기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분명 어제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선생님은 왈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잠그며 제 손을 잡고 교실로 데려가려 하셨습니다. 나 도시락 없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선생님의 손을 뿌리치고 운동장을 내달렸어요.
다행히도 선생님은 그런 저를 멀찌감치 바라보기만 하실 뿐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처럼 학교에 도착해 가방을 걸어 두고 공책을 꺼내기 위해 책상 서랍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따뜻한 무언가가 손끝에 느껴졌어요.
엄청 당황스러웠습니다. 덜덜 떨며 몰래 꺼내 본 따뜻한 물건의 정체는 누가 넣어놓은 건지 알 수 없는 도시락이었어요. 저는 1교시가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가 종이 치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가 담임 선생님을 데리고 복도 끝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누가 들 조마조마하며 말씀드렸어요.
“저 선생님 누가 제 서랍에 도시락을 놔뒀는데요. 누구 건지 좀 찾아주세요.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푸하하하고 큰소리로 웃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제 어깨를 두드리며..
“그거 다희 니꺼야 이따 점심시간에 맛있게 먹고 도시락통은 그대로 서랍에 넣어둬!” 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저는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어요. 일주일을 그렇게 공짜 도시락으로 점심을 채우고 다시 다음 주 월요일이 되었어요.
끔찍했던 점심시간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서랍에 손을 넣어 도시락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날 점심시간에 여러분 도시락에는 낯선 쪽지가 들어 있었어요.
쪽지 내용이 궁금했지만, 일단 허겁지겁 밥부터 먹어치웠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서야 쪽지를 열어보았고 쪽지에는 선생님의 글씨가 적혀 있었어요.
“다희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적어 볼래?” 침이 꿀꺽 넘어갔어요. 저는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쪽지를 펼쳐 두고 그날 학교 수업이 몽땅 끝날 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내용을 적어 나갔습니다.
다시 도시락에 쪽지를 넣어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돌아온 화요일에 점심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본 도시락에는 시금치나물이 잔뜩 들어 있었어요.
전날 싫어하는 음식에 적어낸 유일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들어있던 선생님의 쪽지에는..‘메롱 ’ 딱 두 글자가 적혀 있었 심술이 났습니다. 보물찾기 하듯이 시금치나물 사이에 숨겨진 햄을 쏙 꺼내 먹고 도시락을 닫았어요.
그리고 하교길에 오르기 전 먹지 않고 남긴 시금치나물이 생각나더군요. 메롱 두 글자가 약 오르긴 했지만, 막상 시금치를 남긴 걸 보면 선생님께서 실망하실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친구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은 교실에서 저는 다시 도시락 통을 열어 시금치를 퍼먹었어요. 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선생님의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3학년이 끝나감을 알리는 겨울이 되었을 때 저는 생각했어요. 우리 선생님이 영원히 담임 선생님이면 좋겠다고 4학년이 되고, 담임 선생님은 바뀌었지만 수학 시간만 되면 선생님을 계속 볼 수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이 되었지요 그리고 급식실이 다시 가동되면서 도시락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4학년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엄마는 계속 편찮으셨고 저희 집은 여전히 가난했으며 친구들은 여전히 저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반 학기 정도가 지났을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집에는 할머니께서 찾아오셨고 저는 며칠 동안 학교에 나가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엄마가 왜 돌아가셨는지 왜 엄마를 그렇게 혼자도 아무것도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묻지 않았어요. 글쎄요 솔직히 저는 엄마와 할머니가 미웠습니다. 여전히 밉기도 하구요.

그렇게 할머니와 살기 위해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도 생활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학창 시절은 지나갔고 20살이 되었습니다.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면서 회계 공부를 시작했고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특별한 취미도 없었고 월급에 70%를 통장에 모을 수 있었습니다.돈이 모이기 시작했고 마음에 여유는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어느 날에는 등 뒤로 들려오는 커피머신의 소리마저도 듣기 좋은 음악처럼 느껴지고는 했어요. 주말마다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염없이 밖을 보다 자리를 떠나는 손님을 카페 직원은 늘 반겨주었습니다. 그 상냥함이 부산스럽다가도 커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 신이 나서 매주 다른 맛의 커피 추천을 해 주는 직원에게 정말 고마웠었어요.
그리고 어쩌다 보니 저는 카페 커피 머신 앞에 서서 직원에게 커피를 배우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카페의 직원인 줄로만 알았고 직원은 제가 커피가 좋아서 매주 주말마다 카페에 들르는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알고 보니 상냥한 사람은 직원이 아니라 그곳의 사장이었고 저는 커피 맛이 아니라 장소가 주는 편안한 느낌이 좋아 매주 들르는 것이라는 거 한 달 만에야 서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던 그때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싶다.라는 생각을 그저 생각에 그치기만 했더라면 지금의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뒤늦게야 제 속마음을 알게 된 상냥하고 오지랖 넓은 사장이 제 남자친구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님과 직원 사이로 석 달을 넘게 주말마다 짧게 인사를 나누던 어느 두 사람은 한 사람의 오지랖으로 한 달 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커피를 함께 내리게 되었고 어색하고 낯선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애는 저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방식뿐만 아니라 직장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어요. 카페에 드나든 지 정확히 1년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저는 8개월에 접어들던 그날 저는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돈 많은 사람만 사장이 되는 거 아니냐 넌 저의 편견을 고쳐 쓰게 해 준 남자친구 덕분이었어요. 자기도 주머니에 든 땡전 한 푼으로 시작했다고 한 번쯤 좋아하는 일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던 사람 그 사람의 응원에 힘입었던 건지 자신감이 생겼던 건지 저는 그렇게 카페 사장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훨씬 더 작은 평수에 작은 골목 입구에서 시작한 저의 카페는 그렇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는 동안 천천히 성장해 여러 분점을 오픈하기에 이르렀고 저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줄 서서 먹는 커피집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다시 5년이 더 흘렀어요.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여전히 카페 일이 좋은 사장이었습니다.

출산을 하고 아이를 돌보던 시간 동안에도 일을 놓지 않았고 남편이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서 함께해 주는 덕분에 제 공백이 있었음에도 카페는 성장해 갔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지냈던 쪽방만한 화장실이 있고 안방과 옷방 아이 방을 빼고도 방이 남을 정도로 넓은 집에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어느 정도 아이가 크고 나서부터는 저도 다시 매장 일을 시작했어요.
어느 날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청록빛이 도는 유니폼을 입고 청소 업무를 하시는 분과 마주쳤어요.
“타고 올라가세요.“
“다 했어요.” 저와 마주치니 다급하게 손걸레를 정리하며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리셨고 저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워 보였습니다.
마스크 위로 힘주어 둥글게 휘어지는 두 눈에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때문에 서둘러 내리신 것 같은 불편한 마음 같이 가셔도 괜찮은데 괜히 떠난 뒷자리를 한 번 쓱 훑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어요.
비스듬하게 가로로 접어 둥근 주름이 져 있는 모양새가 꼭 목에 두르는 스카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실수로 흘린 것 같아 우선 그걸 주워 들고 다시 1층으로 향했어요.
“어~다시 내려왔네요.” 일층에서 열린 문 너머에는 아주머니가 서계셨습니다. 이로써 제가 불편할까 봐 일부러 내려주신 것이 분명해진 셈이지요 저는 미안한 마음에 더욱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들고 있던 스카프를 건냈습니다.

“이거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요..”
“제 거 맞아요. 고마워요.” 예상했던 것처럼 스카프의 주인은 아주머니였고 민망한 듯 웃음을 짓던 아주머니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무릎 옆에 세워두시고 고개를 숙여 목 뒤로 스카프를 두르셨어요.
턱 아래에서 매듭을 짓는 모습을 제가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아주머니께서 민망한 듯 한 번 더 웃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었는데 왠지 홀린 듯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이시면서도 턱 아래의 손은 매듭이 잘 지워지지 않는지 여러 번 바쁘게 움직여댔습니다.
저는 황급히 손을 뻗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흡사 뚝딱거리는 로봇처럼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손짓으로 스카프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처음 보는 이에 과한 친절에 당황하신 아주머니의 눈썹이 둥글게 휘어졌어요.
너무 익숙한 눈매인데 혹시 예전에 자주 오시던 손님이신가? 스카프를 묶던 손가락에 걸려 마스크가 힘없이 휙 하고 벗겨졌습니다.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하얀 마스크 아래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던 얼굴에 정체가 드러났어요. 그 사람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 책상 서랍에 몰래 도시락을 챙겨주시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선생님은 한 번에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어요.
그저 놀란 얼굴로 여기서 이렇게 제자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말씀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몇 십 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봐오셨을 테니 30년 전의 제 얼굴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습니다.
“김00 선생님 맞으시죠. 선생님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저 금화 초등학교 나왔어요. 밥 굶고 배고플 때 선생님께서 도시락도 매일 같이 챙겨주시고 하셨었는데 다희예요.. 기억 안 나세요?”
“네가! 참 잘 컸어~ 니가 다 희라고 말하기 전에는 꿈에도 몰랐네 너무 예쁘게 잘 자라줘서 건강하구나 보기 좋아.“
이름을 말씀드리면서도 세월이 오래되기도 했고 수많은 제자들이 거쳐 갔으니 기억하지 못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정말 기억난다는 듯 화들짝 놀라시며 알아봐 주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제가 기억되었다는 것이 고맙고 감사했어요.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반가워서 식사라도 같이 하면 좋으련만 내가 오늘은 바로 약속이 있어서 힘들겠네 여기 근처 사는 거면 다음에 또 보자.”

“그럼요 선생님 제가 먼저 식사 대접하고 싶었어요. 선생님 시간 되실 때 제가 이쪽으로 오겠습니다. 연락처 알려주세요. 선생님!“
그런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경비원 아저씨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건물에서 일하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는데 이렇게 서로를 반가워하는 사람들은 처음 봐서요.”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어요.
그 얼굴에는 그동안 이 건물을 스쳐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작고 큰 사연들이 한데 모여 있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을 오랜만에 뵈어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걸까요? 왠지 선생님과 제게 일어난 오늘의 드라마 같은 우연도 그분의 얼굴에 심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분명 반갑고 기분 좋은 이야 이야기이니 또 다른 미소가 피어나지 않을까? 해서 말이에요. 30년 전쯤 저분 밑에서 가르침 받았던 학생 중 한 명이예요.. 하지만 저의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아저씨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으셨습니다.
다시 보니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선함을 널리 알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제게 무언가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아저씨는 선생님의 칭찬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분 참 좋은 분이에요. 저분이 지금은 여기서 청소 일을 하고 계셔도 한때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잖아요. 지금도 여기서 일하시는 게 예전에 가르치던 학생 병원비 보탠다고 어찌 보면 이제 퇴임하시고 쉴 일만 남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가르쳤던 학생 돕겠다고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있는 거죠.“
“얼마나 사정이 딱하든지 자주 이야기 나누는데 듣는 나도 마음이 아프고 신경 쓰일 정도더라니까요? 가족도 아니고 남의 일을 그렇게 돕기가 쉽지 않잖아요. 진짜 대단하신 분이에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이 왜 여기서 청소 일을 하고 계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선생님을 저의 거울삼아 멋진 어른이 되어 보려고 합니다. 거울을 보듯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자주자주 보면서 그렇게 앞으로 선생님께 배워나갈 인생이 기대되어요. 곁에서 오래오래 모시며 마음을 나의 갚고 싶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사랑은 지금까지 사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