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50대 중반의 여성이에요. 굉장히 시골에서 어렵게 자랐어요. 제가 다닌 초등학교 분교는 정말 적은 수의 애들만 있었거든요. 선생님도 네 분밖에 없었고요.. 안 그래도 학생 수가 적은데 도시로 가는 애가 생길 때면 학교 전체가 우울해졌던 기억이 있네요.
저희 집은 먹고사는 데에 바빠서 제 교육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저도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어요. 항상 집안일을 도와야 해서 밭일이 바쁠 때는 결석도 많이 했고요. 중학교는 걸어서 20분을 가서 버스를 타고 또 30분은 가는 곳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것만도 큰일이었죠. 학교 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서 혼자 나가서 사는 애들도 있었어요.

하루는 학교에 갔다 와서 너무 피곤해서 자다가 저녁밥 지으라는 엄마 말에 일어났어요. 곤로에 밥을 안치고 단무지를 묻히는데 엄마가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찬영아 힘들어도 조금만 버텨 중학교만 이렇게 다니고 고등학교 때는 엄마가 어떻게 해서라도 너 편하게 학교 다닐 수 있게 해줄게.”
“ 정말이야. 나야 너무 좋지 근데 정말 해줄 수 있어 우리 집 돈 없잖아.”
“그래서 엄마가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참아 고등학교는 제대로 다녀야 돼 그래야 엄마 아빠보다 더 잘 살 수 있어.” 엄마는 초등학교만 나오셨고 아빠도 중학교까지만 다니셨어요.
엄마가 공부를 못 했던 게 아쉬운 만큼 저만큼은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제가 엄마 아빠보다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충분히 느껴졌어요. 저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에 가자 엄마는 약속대로 제가 도시에 머물 수 있게 방을 얻어주셨어요.
도시라고는 하지만 서울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작은 곳이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모든 게 다 크고 넓게만 느껴졌고 온통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어요.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들었던 적금을 깼다고 하셨어요.
“이런 날을 위해서 내가 조금씩 모아뒀던 거야. 네가 고등학교라도 나온 보려면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더라고. 생각보다 돈이 많이 모아지진 않았어도 네 쓸 방은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 엄마 진짜 고마워 나 놀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할게 주말마다 집에 와서 엄마 아빠도 잘 도울게.” 아빠는 제가 집을 떠나서 공부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으셨어요. 근처에 먼 친척이 있어서 저를 봐줄 수 있어서 괜찮겠다고도 하셨고요.

또 전보다 형편이 좀 나아져서 저희 집도 바쁠 때에는 사람을 쓸 수 있게 됐어요. 그 덕분에 저는 학교생활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었어요. 밭맬 걱정이나 산에 가서 버섯 딸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홀가분하고 좋았는지 몰라요. 학교생활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고3이 되니까. 대학에 갈 아이들과 취직할 아이들로 갈라지게 됐고 저는 취직하는 쪽을 선택했어요. 명문대에 갈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는 있을 정도의 성적이었어요.
선생님은 아까워했지만, 저는 얼른 돈을 벌고 싶었거든요. 저는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작은 회사에 격리 보조를 취직하게 됐어요.
“엄마 아빠가 지금 대학까지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엄마 말 명심해 네 삶은 네가 바꿀 수 있는 거야. 알았지!” 저는 알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회사에 다녀보니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게 보통 각오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한참이 지나서야 용기를 내서 야간대학에 원서를 내기로 했어요. 모아놓은 돈도 있고 엄마 말씀처럼 대학 졸업장이 있으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때부터 회사가 끝나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생활을 시작했고, 몇 년간 고생 끝에 저는 경영학과 졸업장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전산회계 업무 자격증도 같이 땄고 그 덕인지 저는 중소기업 회사에 경리로 들어가게 됐죠. 거기서 남편을 만나게 됐어요. 그 사람은 저희 회사가 물건을 납품하는 대기업 직원이었어요. 직급도 팀장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남자의 능력에 반했고 그 사람은 제가 뭐든 적극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매력 있다고 하더라고요.
남자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방대 교수였는데 지적이고 고상한 모습이 참 좋아 보였어요. 나이도 많지 않으신데, 공부를 하면서 아이를 키웠을 걸 생각하니 존경심도 들더군요. 혹시라도 제 학벌을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을까? 걱정도 했어요. 하지만 큰 문제 삼지 않아서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집안 큰 행사 자리에 절대 저를 부르지 않았어요. 항상 남편만 혼자 갔다 오곤 했거든요. 아무래도 시댁 모임은 저한테 어려운 자리라서 처음엔 속으로 좋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석연치 않은 게 느껴졌어요. 하루는 시어머니가 왜 중요한 행사에 저를 안 부르는지 남편을 붙잡고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우리 친척들이 전부 고학력자의 직업도 좋은 사람들이 많거든. 엄마가 비교된다고 중요한 일에는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
“내가 기죽을까? 봐 신경 써서 그러는 거야. 그런 거면 난 괜찮아.! 아무리 내가 모자라도 그래도 당신한테 아내고 며느리인데 중요할 때마다 빠지고 일도 안 하면 다들 뭐라고 하겠어?”라고?” 하자
남편은 더듬으면서 겨우 하는 말이..
“그게 사실은 너랑 결혼하는 조건이 그거였어. 집안 중요한 행사에 부르지 않는 거 그냥 조용히 나하고만 살라는 거였어.”

“ 뭐라고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있어? 이건 너무하잖아. 내가 창피하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을 왜 말 안 했어?”
“네가 이럴까 봐 말 안 한 거야. 지금도 봐 너 이렇게 방방 뜰 게 뻔한데 어떻게 말을 하냐?”
그것뿐이 아니었어요. 시어머니는 집에 제 친구들도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더라고요. 저랑 친구면 수준도 비슷할 테니 그런 사람 드나들게 하지 말라고 했다나요? 너무 속이 상했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어요. 저는 이런 결혼 생활을 해야 되는 건지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입맛도 없을 만큼 고민했어요. 시어머니가 지금은 나한테 편견이 있어서 저러지만 내가 잘하면 인정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시어머니 생신이 돌아오고 있었어요.
저는 새벽같이 일어나 시장에 가서 싱싱한 재료들을 사다가 정성껏 전을 부치고 잡채와 갈비찜도 만들었어요. 마침 엄마가 보내주신 꿀이 있어서 그것도 포장을 했죠. 전부 보자기에 싸놓고 두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어요. 끙끙대며 그것들을 들고 시댁에 갔더니, 저를 본 시어머니 얼굴이 험악해졌어요.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거야? 그것들은 다 뭐고?”
“어머니 오늘 생신이시잖아요. 제가 음식 몇 가지 해봤어요. 그리고 이건 시골에서 온 꿀인데 진짜 좋은 거예요. 아침마다 한 숟갈씩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시어머니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음식통들과 꿀을 마당으로 끌어내서 집어던지는 겁니다.

“난 내 집에 이런 하찮은 것들 털끝만큼도 못 들여놓는다 감히 너 따위가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어? 뭐? 시골에서 온 꿀 난 백화점에서 수입한 꿀 아니면 쳐다도 안 보는 사람이야. 네가 지금 날 뭘로 보고 있단 걸 가져온 거냐? 지금 손님들 앞에서 날 망신 주겠다고 작정한 거지. 정말이지 우진이 애는 왜 이런 근본 없는 그런 것하고 결혼을 한다고 했나 몰라?”
“어떻게든 뜯어말렸어야 되는데 괜히 점쟁이 말에 홀려서는 되지도 않은 애를 들여서 이런 꼴을 다 보고 아우 속상해.”시어머니는 저와 남편의 결혼을 반대하다가 결국 점을 보러 갔고 거기서 저와 결혼하면 남편도 자기도 잘 되고 집안이 핀다고 해서 반신반의하며 결혼을 허락했던 거였어요. 대신 저를 집안 중요한 자리에 부르지 않기로 했던 거예요.
그 중요한 자리에 시어머니 생신도 포함됐다는 걸 저는 몰랐죠. 대학 교수식이나 되는 사람이 점쟁이 말을 듣고 결혼을 시켰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어요. 비참했지만, 버려진 음식들은 그렇다 치고 엄마가 보내주신 꿀병은 하수구 구멍 있는 데까지 굴러갔더라고요. 그걸 구하려고 고생하셨을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날 밤 집에 온 남편은 저를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더군요.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가. 내가 가자는 말 안 했으면 가질 말아야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어. 오늘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좋은 날인데 기분 정말 잡쳤다고..”
“당신은 내 생각은 안 해 내가 하루 종일 장보고 음식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아무리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사람 정성을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

“우리 엄마가 원래 길바닥에서 파는 걸로는 보리차도 안 끓이는 분이야 재료 하나에도 얼마나 신경을 쓰시는데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는 그런 걸로 만들었으니 오죽하겠어? 안 그래도 당신한테 슬슬 채소 하나라도 백화점에서 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결국 이런 사달이 났네. 차라리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아 참~ 그리고 무슨 꿀도 가져갔다며 시골에서 온 거 설탕 먹인 가짜가 천지인데 그걸 선물로 가져가 우리 엄마를 뭘로 보고 그 말 들으니까. 진짜 나도 기분 나쁘더라.”
“당신이야말로 우리 엄마를 뭘로 보고 그렇게 말을 해 꿀 정말 귀한 거야. 내가 어릴 적부터 밴 아저씨가 직접 채취하신 야생 꿀이라고.”.” 그렇게 저와 남편은 밤새 싸웠고 남편은 새벽같이 집을 나가서 하루 종일 연락도 하지 않았어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하루 종일 일도 손에 안 잡히는데 시어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시어머니는 들어오자마자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어요.
“아우 키키한 냄새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아니 저게 뭐야? 청국장이냐?” 저희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거예요.
“아우 내가 못 살아 정말 넌 니네 친정엄마가 보낸 거 아니면 먹고 살 게 없니? 왜 저런 냄새를 집에서 풍겨 당장 치우지 못해. 그리고 너 수찬이한테 꿀이 무슨 야생 꿀이라는 둥 그러면서 애를 쥐잡듯 했더라. 하룻밤 새 애 얼굴이 반쪽이 돼서 들어오는데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그이가 어머니한테 갔어요?” 저랑 싸우고 나서 간 데가 시댁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게다가 저랑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한 모양이었어요.
“너는 네가 살던 데니까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우린 아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한테도 안 주는 것들을 갖고 와서 우리를 모욕해 놓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이 결혼 없던 일로 하자.”

” 네 아니~ 어머니 제가 음식 한 번 해 갔다고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혼이라뇨? 그리고 그런 일은 저랑 사람이 정하는 거지 어머니가 하실 말씀은 아니잖아요.”
“이거 봐 어디서 버릇없이 말대답이나 하고 우리 너네랑 달라서 집안 어른들 말씀을 중시하는 사람이야 어른이 결정을 내렸으면 따라야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걸 때려와서 집안 꼬라며 이게 뭔지 몰라. 내가 돌팔이 점쟁이한테 정말 속았어. 아무튼 너 당장 짐 싸서 일단 이 집에서 나가 있어라. 조만간 우리가 서류 준비해서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남편한테 전화해서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같았어요.
“내가 일생일대에 실수를 한 것 같아 결혼이라는 걸 그렇게 한순간 감정에 결정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땐 내가 뭐에 쉬었었나 봐 우리 서로 자란 환경도 그렇고 안 맞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서로한테 더 도움 되는 일 아니겠어? 깔끔하게 헤어지자.” 결국 저는 쫓겨나듯이 집을 나왔어요. 집에 돌아가자니 부모님이 너무 속상해할 것 같아서 며칠을 여관방에서 혼자 지냈죠 그런데 시댁에서 친정으로 서류를 보내는 바람에 부모님도 다 알게 되셨고 엄마는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어요.
“네 친구 희선이가 너 여기 있다고 하드라 왜 혼자 여기 이러고 있어 집에 와야지.” 저는 엄마의 따뜻한 말에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어요. 정말 그때 두고 보자는 마음이 생겨서 이를 악물고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우선 제 대학 성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학교 경영학과에 편입을 했고 거기서 일 등으로 졸업하면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 대학원에 갔습니다. 집안 야간대학에서 편입한 4년제 대학을 일 등으로 졸업하기 위해 정말 미친 듯이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대학원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장학금을 받아서 갔지만 생활비는 부족할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진짜 정말로 꼭 뭔가 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생활을 버텨냈어요.
박사 과정을 5년에 끝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5년을 넘겨서 7년도 걸리고 8년 만에 마쳤거든요. 저는 5년 안에 박사를 따지 않으면 나머지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고 결국 5년 만에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사이 많은 일들도 있었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가 홀로 저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저는 대학원을 나온 대학에서 강사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대기업 경영연구소와 함께 경영전략도 짜고 논문 발표도 열심히 했죠. 학교에서는 그런 저를 신뢰하게 됐고 저는 5년 후에 정식 교수로 임용되었어요. 그날 엄마께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드렸어요.
“엄마가 나한테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거야. 이건 다 엄마가 만든 거야. 엄마 고마워요.”
” 네가 열심히 살았으니까. 훌륭한 사람이 된 거지 엄마는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이렇게 잘 살아줘서 엄마가 고마워~” 이상하게 그렇게 좋은 날 엄마와 저는 시댁에서 쫓겨났던 때가 떠올라 또다시 눈물을 흘렸어요. 그때는 인생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너무 비참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되니 정말 꿈만 같더군요.
몇 년 후에 저희 학교에서는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교수로 임용하는 공고를 냈고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했어요. 그중에 대학원 이상의 학력에 실적이 괜찮은 사람들을 추려냈고 저는 면접관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인연이라는 게 참 악연도 인연이긴 한가 보더라고
면접을 진행하는 회의실로 가던 저는 복도에 앉아있던 사람들 중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어요. 바로 전남편이었어요. 사람은 저를 보고 긴가민가하는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겠죠. 지방 야간 대학을 나왔다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면접을 보러 들어와서 제 이름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고 사람은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버벅대다가 면접을 끝내고 말았어요. 면접이 끝나고 나오는데 남편이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정말 맞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지?”라는데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을 지나쳤어요. 그러자 전 남편은 저를 붙잡고서..
“내가 원래는 준비도 많이 하고 아까 질문에도 다 대답할 수 있었거든. 근데 너무 놀라서 잠시 당황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나 다시 한번 기회 줄 수 없을까? 그렇게 말 좀 해 줘.”
“이봐요! 여기가 이들 장 면접을 다시 보게 해 달라는 억지가 어디 있어요? 끝난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것도 다 당신 실력이에요. 자신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니까 자신이나 돌아보세요.”
거기다 면접을 망쳐서 점수가 낮아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발표가 난 직후에 전남편과 시어머니가 저를 찾아왔어요.
“네가 예전 일로 사적인 감정 때문에 우리 아들을 떨어뜨린 것 같아서 내가 문제 제기를 하려고 왔다.” 라는데 여전히 저를 깔보는 표정으로 보더라고요.
“이 일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나는 학교 측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고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나 지금은 우리 학교 명예 교수야 언론에서 내 말을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시어머니 옆에 전 남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었어요. 옆에서 보던 조교가 듣다 참지 못하고
“할머니 어디 와서 이런 행패를 부리시는 거예요. 저희 대학을 뭘로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리고 저희 교수님 미국 대학에서도 알아주는 분이셨어요. 우리 학과장님이시라고요.. 당장 사과하세요!”
그러자 시어머니와 전 남편은 표정이 싹 바뀌었어요. 시어머니는 그제야 학과장이라는 제 명패를 받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감정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수 또 있죠. 우리 아들이 떨어진 거 보면 뭔가 장난질 친 게 분명하다고 뭔가 했죠. 우리의 점수 장난쳤죠?” 라며 더듬더듬 저한테 존댓말을 쓰는 시어머니를 보니 웃음이 나왔어요.

“정 그러시면 제가 채점표 보여드릴게요. 그나마 점수는 제가 제일 괜찮게 줬거든요.” 저는 시어머니와 전남편한테 채점표를 보여줬죠 그걸 본 두 사람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어쩔 줄 몰랐어요. 대부분의 교수들이 전남편한테 가장 낮은 점수를 줬거든요.
“할머니 여긴 할머니가 있던 그런 작은 대학 하고는 수준이 달라요. 누구 말 한마디 때문에 떨어뜨리는 데가 아니라고요. 저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 계속하시면 저도 저분 회사에 저한테 어떤 식이었는지 어떻게 했는지 알릴 거예요. 인성이 먼저인 거 아니겠어요. 요즘은 시댁이 며느리한테 함부로 하는 거에 민감한 거 아시죠. 할머니 학교에서 명예교수라고요. 할머니는 학교에서 저한테 했던 행동이며.. 오늘 이러고 와서 행패 부리는 거 알면 계속 자리에 두겠어요.”라고 하자 시어머니는 그제야..
“그때는 우리가 정말 실수했다.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비굴할 정도로 비는 시어머니를 본 전남편은 굉장히 당황하더라고요.
“엄마 갑자기 왜 이래 그냥 가면 되지 뭘 빌기까지 해 너 조용히 안 해 네가 뭘 안다고 이래 교수 사회에서 평판 한 번 깎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자신의 위신과 명예만 중요한 시어머니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어요.
“됐으니까. 돌아들 가세요. 더는 찾아오지 마시고요. 한 번만 더 와서 엉뚱한 소리 하면 그땐 진짜 가만 안 있어요. 명예훼손으로도 고소할 거예요.”라고 하자 남편은 억울하다는 듯~
“뭘 그렇게까지 말해 난 엄마 때문에 그런 것밖에 없어 정말 내 뜻이 아니었다고 혹시라도 나한테 섭섭한 거 있으면 다 풀고 회사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부탁이야!”

“이보세요. 저랑 무슨 사이인가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몰라요. 얻다 대고 자꾸 반말이니?”라고 소리쳤더니, 사람은 놀라서 말을 못 하다가 더듬거리더군요. 그렇게 남편과 시어머니는 돌아갔지만 후에도 몇 번 저를 찾아왔어요. 어떻게든 제 비위를 맞춰서 좋은 자리를 얻어보겠다는 속셈이었죠. 나는 만나주지도 않았고 조교들한테도 제 방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어요. 결국 두 사람은 더 이상 저를 찾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시어머니가 교수 임용 당시 논문이 다른 사람 걸 표절한 게 들통나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고 하더라고요. 참나. 진짜 세상 일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잘난 척을 해대더니, 논문 표절이라뇨… 학교에서는 시어머니를 연구비 횡령으로 고소도 했다고 해요. 전 남편은 회사에서 정리해고 때 쫓겨났고요.
그 후로 지금까지 두 사람에 대해 들은 소식은 없습니다. 저는 늦은 나이지만 전 부인과 사별한 사람을 만나서 재혼을 했고 친구처럼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어요. 엄마도 아직까지는 건강히 잘 계시고요. 옛말에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는데 왜 그렇게들 자기보다 좀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무시부터 하고 보는 걸까요? 사람에겐 각자 사람의 보석 같은 가치가 있는 건데 말이죠. 저는 우리 학교의 젊은 청춘들을 믿고 희망을 보며 오늘도 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