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 암에 걸렸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어머니 얼굴 한번 보는 게 소원입니다.” 해외로 입양된 한 남자의 간절한 바람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김민수 씨는 1981년 4월 24일 오후 5시쯤 대전역에서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그날 오후, 대합실 안에서 울고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그를 발견한 사람은 그를 대전 피얼스영아원 (현재 늘사랑아동센터)에 맡겼다. 그러나 그의 옷가지 등에서는 정확한 인적 사항이 적힌 쪽지나 편지 같은 것은 없었다.

아동신상카드 기록상 그의 생년월일은 1977년 4월 25일로 되어 있었지만,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영아원 관계자 등이 4∼5살로 보이는 남자아이라고 판단하고, 입소 날짜에 맞춰 임의로 생년월일을 정하고 김민수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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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김민수 씨는 한국에서 자신의 뿌리를 잃고, 얼마 후 노르웨이로 입양되었다. 그는 노르웨이 남부 도시 퇸스베르그와 플레케피오르에서 성장했다.

그는 트롬쇠 대학3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금융기관에 취업하여 회계사로 일했다. 2011년에는 페루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하여 오슬로에 정착했다. 현재 그는 8살짜리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김민수 씨는 학창 시절이 쉽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금발과 푸른 눈의 백인들 사이에서 ‘아시아 입양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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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학교에서 ‘황인’, ‘원숭이’, ‘중국인’ 등의 차별과 괴롭힘을 겪었다. 그는 축구에 소질을 보여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축구를 잘하는 방법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김민수 씨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자신의 과거와 직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부모와 형제자매가 있는지, 왜 자신을 버렸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등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는 노르웨이의 입양 기관과 홀트아동복지회4를 통해 친부모를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언젠가 친부모를 만나서 꽉 안고, 감사하고, 용서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머니 저 암에 걸렸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어머니 얼굴 한번 보는 게 소원입니다." 해외로 입양된 한 남자의 간절한 바람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특히 본인과 똑 닮은 아들이 커나가는 모습을 보며 가족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것 또한 가슴 한쪽에 멍에로 남았다.

더 늦기 전에 친부모를 찾아야 한다고 마음 먹었지만, 2021년 6월 불현듯 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뿌리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 가족. 그는 항암치료와 동시에 아동권리보장원을 통해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모으는 중이다.

노르웨이 현지에서 유전자 검사를 앞둔 그는 오슬로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DNA 샘플을 경찰청 실종아동 데이터에 등록하고 내년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친부모를 찾고 나서야 부모가 본인을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다른 입양인들의 사연은 그에게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됐다.

그는 “양부모님은 내가 ‘1979년생이고 서울역에서 버려졌다’고 말했지만, 직접 조사해보니 나는 1977년생에 대전역에서 발견됐다”며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어쩌면 친부모님이 날 버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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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친부모님이 절 버린 게 사실이라고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며 “그동안 부모님은 어떻게 살았는지, 저는 어떤 아이였는지, 형제자매는 있는지, 궁금한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항암치료와 가족 찾기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한 그는 작은 단서도 소중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씨는 “제가 대전역에서 발견될 당시 제 옆에 보따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보따리도 저와 함께 노르웨이로 왔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며 “42년 전 보따리의 행방을 쫓는 게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 가서 찾아보려고 한다. 암 치료도 가족 찾기도 모두 기적이 벌어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친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그는 자신과 함께 있던 보따리가 가족 찾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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