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수임료 한푼도 안 받고 약자의 편에 서서 큰 힘이 되어준 빵원 짜리 변호사, 이 땅에 다시는 안나올 인권변호사의 파란만장한 가슴아픈 이야기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소시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싸워주던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영래 변호사인데요. 

조변호사는 1970년대와 80년대 독재와 맞서 싸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1990년, 44세 젊은 나이로 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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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그는 누구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조영래는 대구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소문난 ‘방천가의 빈민가’에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이후 그의 아버지는 7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고  서울의 달동네를 떠돌며 어렵게 생활였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빛난 그의 천재성은 남달랐습니다. 경기중과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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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중학교 때부터 한자로 가득한 불경을 읽기 시작했고 사법시험 1차 영어문제집을 직접 쓸 정도로 영어실력도 탁월했습니다.

우리나라 수제들이 모인다는 경기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는 공부만 죽어라 하는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고교생들로 구성된 불교학생회 ‘룸비니’에서 활동하였고 대입 준비에 전념해야 할 3학년 재학 중에는  한일 회담 반대 시위를 하다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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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수석 졸업을 했고,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 진학 후, 그는 변함없이 1969년 졸업할 때까지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규탄, 6·7 부정선거규탄, 삼성개헌 반대, 고련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독재자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조영래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와 원래 알던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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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970년  11월,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는 전태일의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암담한 노동현실의 근본원인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위 현장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며 법전과 함께 분신자살하여 22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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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전태일 열사의 빈소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읽으려고 밤새워 씨름하다가 어머니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원이 없겠어요’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한자로 된 법률 용어를 읽는 일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청년 전태일은 결국 죽었지만 조영래는 전태일이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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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학생들에게 전태일 열사의 삶을 알려주고 싶던 조영래는 전태일의 삶이 닮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71년 2월 조영래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이런 다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켜 비굴하게 만들지 않겠다. 다른 것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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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사법연수원 재학 중인 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1년 6개월이 간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후 또다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 가까이 피신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피 기군 중  생전에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전태일의 죽음을 기록하는데 몰두했습니다. 3년 동안 청계천 일대를 누비며 전태일의 발자취를 쫓아 그의 대한 이야기를 집필한 것이죠.

원고는 완성되었지만 출판은 쉽지 않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83년에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에 작가 미명으로 국내에서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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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전두환 정권은 이 책의 판매를 금지시켰고 이 책은 서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 운동 단체, 종교단체, 노동조합 등을 통해 판매되었습니다. 

조영래는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이 책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고 그의 사후인 1991년 <전태일 평전>이란 이름으로 개정판을 내면서 저자가 조영래임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82년 35세의 나이로 늦깎이 변호사가 된 그는 작고하기까지 8년 동안 인권, 노동, 빈민, 환경, 학생 관련 사건에 힘을 쏟으며 기념비적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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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서울 망원동 수재민 2만 4천명과 5년이 넘는 법정 싸움을 벌여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는데 이는 국내 ‘집단소송’의 효시로 꼽히고 있습니다.

1988년에는 서울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의 진폐증 환자를 도와 ‘공해병’을 처음으로 인정받았고 같은 해, 민변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이후 조영래 변호사의 가장 유명한 이력 중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있습니다.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귄인숙은 당시 노동현장에 참여하였던 다른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휴학을 하고 허명숙으라는 가명으로 학력을 낮춰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위장취업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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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6월 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을 위조한 공문서변조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여행된 뒤 지하 조사실에서 문귀동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귀동은 위장취업과 무관한 이른바 5·3 인천사태의 관련자 행방을 캐물으면서 반말과 욕설은 물론, 뒤로 수갑이 채워져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여성에게 자신의 성기로 추행하면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권인숙은 조영래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1986년 7월 3일,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여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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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안 당국은 1986년, 7월 17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권인숙을 “급진 좌파 시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한 가줄자일 뿐”이라고 매도하였고 언론은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성적 수치심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라고 여론을 호도했습니다.

비록, 이 사건에서 권인숙은 1심 재판부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조영래 변호사의 변론으로 전두환 정권 퇴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은 1987년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됐고 결국 88년 4월 성고문 경찰 문귀동은 구속되었으며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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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조영래는 학생운동가, 반독재투쟁가, 인권변호사, 문필가였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잠시도 입에서 담배를 떼지 않았던 유명한 골초였습니다.

결국, 그는 1990년 9월 청천벽력같이 폐암 3기의 진단을 받았고 3개월 뒤 43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후,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이 실린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변호사 또 나올까…

7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글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망원동 수재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구로 동맹 파업)’, ‘진폐증 박길래 사건’, ‘부천 성고문 사건’ 등 거대 권력에 맞서는 소시민들의 변호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무료로 맡으며 그에게 ‘빵원짜리’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그는 약자의 편에서 100점짜리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자기 경험과 인생의 철학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내는 엽서 편지에도 조 변호사의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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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거나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1990년 1월 18일 장남 일평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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